2020년 11월 29일, 오가사와라 제도 아침해의 산 (小笠原諸島 旭山)

 

진실한 마음의 적은 이성과 의심이다. 신께서 어떠한 것을 명령하셨을 때, 이성은 '그런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간단히 판단하여 인간 안에는 약속의 성취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러므로 신의 약속을 바라볼 때 이런 이성, 의심과 싸우면서 그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래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본성 전체의 변화와 혁명을 의미한다. 신의 명령을 올바르게 받아들은 사람은 다른 인간들에게는 전적으로 모순되게 보이는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따라서 신앙이란 능동이 아닌 수동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세상의 이성 및 육적인 것과 신의 명령의 결정적 차이, 그것은 십자가의 여부다. 세상은 처음엔 화려하고 그럴 듯한 것을 보여주어 육체의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신의 명령은 먼저 십자가를 보여 주고 나서 그 뒤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은혜를 '약속'한다. 따라서 신의 달란트를 믿는 자는 보이지 않는 신의 약속을 붙잡고 그 말씀에 따라 살고 움직이며, 이성과 육체, 의심과 끊임없이 싸우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오직 인간은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신의 의롭다 하시는 명령을 받들어 믿는 것으로서 참으로 진정한 의인이 되리라.

- 신약성서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2020년 3월 2일, 한국에서 일본으로 출국 당시 작성하던 서류들은 대봉쇄의 서막이었다.

혼인신고를 앞두고 회사 후배 결혼식 참여차 2월 막날에 서울을 방문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마지막 한국 방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누님"이제 결혼하면 그 애니 이벤트하고 그런것좀 줄여야지."

나"알겠습니다. 각오하고 절반이하로 줄이겠습니다."

누님"절반? 안돼. 1/3으로 줄여"

나"사, 삼분의 일?! 그건 좀..."

누님"줄엿!"

 

....3분의 1이 아니라 아예 전멸할 줄은 강권하신 누님조차 예상치 못했을 것.

 

2020년 3월 14일, 누마즈 아게츠지 상점가 공식 트위터

2020년 4월 3일, 아마미 하루카의 생일이자 정식으로 교제한지 100일을 하루 채우지 못한 나와 아이미쨩은, 도쿄 미나토구청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고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처음 만나 한두시간 이내로 상대방에게 갖는 강한 호감을 '첫 눈에 반했다'고 정의한다면, 나와 아이미쨩은 분명 서로가 첫 눈에 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말그대로, 천생연분. 과연 하나님이 계시하고 대천사 호리에 유이님이 명령하신 결혼답다. 그렇게 부모님도 홍차 누님도 사귄지 석 달만에 결혼하는 가풍(?)을 나도 이었다.

 

오타쿠(?) 세계에서 결혼 자체가 드물지만, 누구 말마따나 "미즈우미님은 결혼조차 평범하지 않군요"란 술회 그대로 유별난 내 결혼에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셨다. 광속이라 묘사해도 될 속도전. 일본인 여성과의 국제 결혼. 프러포즈 장소는 치카네 료칸. 데레마스 시부야 린쨩네 꽃집에서 제작한 꽃다발로 프러포즈. 한일 커플로는 처음으로 수여받아 구청에 실제로 제출한 러브라이브 선샤인 혼인 신고서. 양가 상견례는커녕 아직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은 며느리랑 직접 만난 적도 없이 스카이프로 인사. 코로나랑 관계없이 결혼식은 시원하게 집어 던져버리기 등..

 

결혼 1주일 뒤, 동료 2명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며(..) 근처 신혼집으로 이사했다. 여전히 2년 전 대천사님께서 명령하신 니지가사키의 맞은편 지역.. 코로나는 나날이 기승을 부렸다. 권유 수준이던 재택은 강제로 바뀌었고, 4월 5월 6월까지 3개월간 실장의 허가 없이 출근이 금지되었다. 일본정부는 교부금을 전국민에게 쥐어주며 5월 초 골든위크가 끝날 때까지 긴급사태 발령과 강력한 자숙 요청으로 박자를 맞췄다.

 

특별출연(?) - 후리하타 아이

4월은 신혼집 택배를 받고 가구를 조립하는 등 집안을 정비했다. 한달 정도 지나 생활이 안정되자, 5월부터 동영상 강좌를 끊고 Project Manager Professional 시험을 준비하여 두어달만에 합격해 끝내버렸다. 우리 부부는 결혼까지 연애를 거의 안한 거나 다름없어서, 이 3개월은 전면 재택, 새 생활에 적응, 자격증을 따기, 둘이서 함께 집에서 지내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정확히는 유익한 시간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1취미 이벤터 활동은 역병 앞에 무참히 갈려나갔다. 2월 말 북큐슈 샤론 라이브를 마지막으로 줄줄이 취소되었다. 뮤쿠아니지가 한 스테이지에 오르는 럽페스와, 역사적인 첫 아이마스 내한 이벤트가 개최된 것은 지금 돌이켜 봄에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이었다.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성우와 아이돌조차 갑자기 백수(?)가 되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간간히 개최되기 시작하는 온라인 이벤트를 보며 다들 아쉬움을 달랬다.

 

2020년 4월 4일, 혼인신고 다음날 찾은 총선재외국민투표

 

7월부터 With 코로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방역수칙 준수를 전제로 출근과 출장, 외식과 국내여행이 점차 재개되었다. 고투라는 뻘짓(..)으로 보이지만 나름 서비스직종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국가적 캠페인으로 인해 고사직전이던 여행업계의 숨통이 조금 트였다고. 이에 대천사님 팬력 20주년을 기념으로 야마가타 긴잔온천과 이와테 후지호텔 등 토호쿠지역을 다녀왔고, 평상시엔 단념하고 있던 오가사와라 제도까지 항해하며 일생일대 두번다시 없을 기회를 살렸다. 그렇게 나는 고교 1년생 2000년부터 시작된 내 20주년의 천로역정을 나름대로 기념하고 있었다.

 

2020년 11월 17일, D.C.~다카포~의 성지 세토내해 시마나미 해도를 바라보는 아이미쨩

나의 아내 아이미쨩. 간호사는 이 시대의 영웅이었다. 전인류가 고통받는 가운데 최전선에서 역병과 맞서 싸우는 히어로. 내 나름 서포트했건만, 일이 힘든 것을 넘어 멘탈이 갈리는 것은 중견 간호사인 그녀도 버티기 힘들었다. 몇 번이나 발작하듯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가까스로 막았다. 모든 계획을 내가 설계하고 준비하여 아이미쨩에게 좋은 음식, 호캉스, 여행, 이벤트 등으로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미쨩은 다른 동료들에게 "상냥함의 덩어리(優しさの塊)"라 소개할 정도로, 더더욱 나를 심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트위터에서 보이는 아이미쨩의 무거운 사랑은 밝은 내용만 개그스럽게 적어서 그렇지, 다크 사이드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2차원까지 질투하는 얀데레(..)가 될 줄은 나도 몰랐지만.

 

정 안되면 전업주부 시키고 내가 먹여살리며 돌보는 것까지 각오했지만, 다행히도 새 직장을 찾아 이직에 성공했다. 그곳이 '니지가사키 병원'인 것은 또하나의 운명. 2년 전 대천사님이 주신 명령은 결국 돌고 돌아 이렇게 이루어져 갔다. 정식으로 교제한지 1주년 기념 및 크리스마스에 누마즈 우치우라 아와시마섬 마리쨩의 호텔 디너 자리에서, 코로나19 팬데믹과 락다운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한 서로를 상이군인처럼 위로했다.

 

2020년 8월 14일, 야카타부네屋形船 오다이바 바다 위에서 레인보우브릿지

 

코로나로 일상이 흔들리는 가운데 가치관도 동시에 흔들렸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나라들은 사실 그다지 선진적이지 않았다. 상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다지 상식이 아니었다. 성착취로 거액을 긁어모은 n번방 사건. 실물경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생계를 위협받는데, 동시에 부동산과 주식(과 코인?)은 대호황을 맞이한 것은 블랙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노력과 노동의 가치는 떨어지고 자본이 자본을 낳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올해는 너무했다.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며 갈려나가는데 아무 케어도 받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아내를 지탱하느라 사적 감정이 조금 들어갔을지도.

 

 

2020년 11월 7일, 러브히나 히나타장의 모델지 긴잔온천

 

이 상황에서 어떤 가치관과 삶의 모델을 향해 살아야 할 것인가.. 물론 이래야 저래야 한다 이빨까는 꼰대질은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사는 모습이 주변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락다운으로 고립된 나는 더욱 '근본'을 찾아 헤맸다. 무엇이 나의 Origin이었는가. 팬력 20주년을 맞이한 히나타장 온천여행과, 오랫동안 동경해온 오가사와라 제도로 항해한 것도 그 이유였다. 히나타장과 오가사와라 제도 뿐만이 아니라, 나의 여행은 하나하나가 전부 나만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첫 일본여행 마지막 날에 들른 오다이바에서 러브히나의 꿈을 깨우치고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다. 오다이바는 내게 꿈을 향하여 진격하도록 신과 만남을 가진 신성한 장소이며 이 땅을 향하게 되리라는 약속은 지금도 진행 중

 

삼권분립의 원칙 - 종교(개신기독교) 전공(화학공학) 취미(이벤터활동)의 3대 영역은 견제와 조화를 이룬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니다. 나뿐 아니라 동료들이라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잠시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세상의 시류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게 있어 그 가치를 향한 발걸음을 가장 압축하여 알기 쉽게 드러낸 것이라면 '주식의 이벤터 활동'이다. 너도 결국 주식얘기냐? 아니 잠시만요.

 

2년 전 주식의 이벤터 활동으로 나는 주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낮을때 사서 비쌀때 되판다? 아니, 주식은 티켓이다. 굿즈를 받고, 성우 목소리로 사업보고를 경청하며, 팬으로서 경영진에게 다이렉트로 건의할 수 있는 신개념의 이벤터 활동. 경제학을 전공한 절친이 미쳤냐고 뒷목을 잡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추구한 모든 것을 얻었다. (주가 오르는 것은 처음부터 추구하지 않았다.) 지금도 Aqours와 아이마스의 액자가 벽에 걸려 있고, 무엇보다 경영진에게 간청하여 내한 공연이 몇 번이고 성사되었으니까. (정말로 그게 효과가 있었는진 몰라도.)

 

2020 오가사와라 명예의 전당 - 아이마스 15주년 아트 워크가 추가되었다

 

결혼도 마찬가지. 세간에서 이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여럿 사람 바꿔가며 사귀어 본다. 간을 한참 본다. 동거도 해보고. 그러다 결혼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Plus, 남오타쿠(?)들은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선호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독일에서 대천사님은 준엄하게 명령을 내리셨다. "취미의 일치가 아니라, 지금까지 소중히 지켜온 가치가 일치해야 한다." 그 명령 덕에 아이미쨩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다"를 확신하였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겠답시고 다시 라이브 현장을 찾았을때 호리에 유이님의 "내가 굿즈로 낸 도장 케이스로 결혼 등 소중한 서류에 도장을 찍어라!"는 확실한 명령이 떨어진 덕택에, 연애 동거 결혼식 따위를 전부 생략하고 광속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토니카와 실사판. 세간의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소중히 여겨 온 가치를 따르라는 대천사님의 명령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어 유효하였다.

 

이것도 매년 연말 에세이에 적고 있지만, 노력은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라노호시여학원은 폐교되었다. 그러나 Aqours가 지켜온 가치와 시간은 영원히 남았다. 시즈오카 어촌 소녀들에서 도쿄 강동구 금수저들(...)에게 무대가 이어졌지만, 니지가사키도 Aqours와 다카포의 정신을 계승했다. 유우쨩과의 사랑우정이라는 소중한 가치는 변치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아유무쨩의 노래에 우리 모두가 감동했다. 노력하면 잘 될거라는 말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세상 속에서, 아유무쨩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소중히 하였다. 그리고 그 가치를 믿었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닌 절친을 향한 얀데레의 사랑 우정이기도 하고, 우리들에게는 최애성우를 향한 사랑이라도 좋다. 어떤 노력을 어떻게는, 그 뒤에 달렸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결혼소식을 알린 후 여성과의 교제 팁(?)에 대해 문의한 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야기를 적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결혼하기 전에 일부 자세하게 설명받은 분들도 있다. 그러나, 독실한 개신기독교 신도를 포함하여, 나와 가장 친한 동료나 친구들조차 아이미쨩과의 만남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대면으로 설명조차 이런데, 글로서 그걸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제안한다면 일본사회의 결혼문화에 대해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한 야마다 마사히로(山田 昌弘)의 저서로 '지금'을 정확히 파악하고, 「はじめての男の婚活マニュアル」나 「꽃중년 프로젝트」등으로 기술적 조언을 받는 정도가 될 듯. 글로 연애를 배운다고 하면 웃음거리가 되지만, 의외로 학술적으로도 흥미있게 읽어볼 만하다. 애시당초 나 역시 연애경험이 일천하고 남에게 조언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님.

 

2020년 10월 30일, 도쿄돔호텔에서 도쿄 돔
2020년 11월 22일, 우츠노미야에서 귀가 중 전철 속에서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록다운 기간, 어떤 P가 내게 물었다.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셨나요.."

 

이벤터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입장 전 동료들과의 인사도, 어울림도, 화환 등 기획도, 뒤풀이도, 아무것도 없이 나 혼자 사이리움을 손에 쥐고서 외롭고 쓸쓸하게 현장에 서서 성우를 바라보던 그 시절. 언젠가 국경을 뛰어넘고 동료들이 모여 다함께 노는 그날이 오기를 혼자서 언제까지고 기원하고 있었다.

 

다시 이벤터의 시대가 오기 전, 아니 그 이전으로 후퇴한 것 같지만..

 

우리가 현장에서 성지에서 함께 모일 그 날은 반드시 온다.

비록 그것이 예전과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한국에 계신 동료 여러분, 일본에 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일본에 계신 동료 여러분,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 날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현장에서 모두가 만날 날을 저는 믿습니다.

 

 

2020년 11월 28일,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바라본 석양

 

2020년 12월 26일, 누마즈 우치우라 아와시마 마리쨩의 호텔

 

"また、ここで会おうよ。"

 

Posted by 水海유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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