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호쿠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고도 거절한 포스팅을 올린 뒤로, 한국에 돌아와서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 좋은 길을 내치다니 정신 나갔어!?’라는 반욕설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던진 이여, 그대의 형태는 일그러졌지만 본말은 진심의 사랑(?)에 감사한다. 양탄자 융단 깔아놓고 ‘WELCOME!!’을 외치는 동네를 거절한다니, 아무래도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가 보이겠지.



<센다이 토호쿠대학에서 열렸던 2008 잡 페어. 2008년 12월 23일 개최.
이 행사에 참가하고 나서, 막바로 크리스로드의 시라유리 여고생들의 핸드벨 연주 촬영질을 해댔다.(..)>



*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 중순까지

일본에 유학으로 간 것이 벌써 2008년 10월의 일이다. 일본에서 대학원 진학이 아니라, 바로 취직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유학초기, 유학생 잡 페어 같은 데에도 참가해봤고, 밤이면 밤마다 구직사이트(일본)를 들락날락거렸으며, 유학생취업지원센터에 등록해서 적도 두고 있다. 닛케이에서 진행하는 취업사이트에 등록해서, 다양한 회사에 프리엔트리를 하기도 했다.

좋은 대기업 회사일 필요도 없고, 월급이 많지 않아도 좋았다. 삶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평범하게 사는 것. 오늘 열심히 일하고 내일 애니송 라이브에 가서 신나게 오타게를 날리는, 그런 소소한 일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본에 도착해서 생활이 안정되자마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구직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력서 쓰는 법이나, 면접 잘 보는 방법에 관한 책도 빌려다가 읽으면서...


* 2009년 2월 말에서 3월 4일까지


<위로부터 공장견학 안내서, 도쿄로 내려가는 승차권, 가장 밑바닥은 Key 10주년 페스타 라이브 티켓>



그런 생각을 근본부터 뒤흔든 사건이 생겼다. 회사 견학 프로그램. 곧 4학년으로 진급하는 학부 3학년생을 대상으로 하며, 도쿄-카나가와, 치바, 아이치(나고야)의 3개 지역으로 나뉘어 실시된다. 해당 지역의 회사 6개를 오전오후로 한 동네씩, 2박 3일에 걸쳐 견학하며, 상대 회사에서는 토호쿠대학의 OB, OG가 나와 맞이해준다. 생생한 회사생활의 조언, 지원방법, 면접요령 등을 가르쳐주며, 다녀와서 감상문(?)을 제출하면 1학점을 부여받는 아주 좋은 과목. 지원자가 꽤 많아서 추첨을 했는데 도쿄-카나가와 지역으로 잘 걸렸다. 이것이 2009년 2월 28일~3월 5일 실시한 '제3차 도쿄방문'이었다.




<2009년 3월 1일, Key 10주년 페스타 행사장>



견학 기간은 2009년 3월 2일~4일 월화수. 그 전인 2월 28일~3월 1일은 도쿄 시나가와에서 「Key 10주년 기념 페스타」가 열렸고, 또 그 직전인 2월 24~27일은 시급 3천엔에 달하는 24시간 풀가동 연소연구가 진행되었다. 밤을 3일 정도 꼴딱 새우고, 얼어붙은 동토를 걷고 있는건지 구름 위를 걷고 있는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피로에 쩔은 채 연구는 2월 27일로 무사히 끝났다. 다음날 아침 2월 28일에 버스로 도쿄에 내달려가 Key 10주년 라이브에 참석. 다음날인 3월 1일에는 Key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정물품을 대량 폭격하고, 하도 기쁜 나머지 나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다음 날부터 3일에 걸쳐 실시된 회사견학은 다소 충격이었다. 근무형태와 생활, 면접에 필요한 스킬과 방법과 경험담, 심지어 연봉 이야기까지 전부 까는(?) 것에는 참으로 놀랄 노자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알았는데... 잡 페어 어쩌고 하는 것은 이미 정보비대칭이 진행될만큼 한참 진행된 마당에, 가장 하급의 정보를 가지고 실시되는 행사였다.




간담회에서 내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쪽은 특히 인사관리담당자라든가 실무자였다. 특히 석유화학기업 저팬 에너지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화공플랜트 현황에 대하여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외국인 근로자 면접방법, 처우 등에 대해서도 좋은 정보를 캐낼 수 있었고, ‘한국의 플랜트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언젠가는 공조가 필요하리라 생각하며, 그 때마다 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외국계 인재가 필요하니, 나중에라도 꼭 엔트리를 해주십사..’같은 말로 대화를 끝마쳤던 기억이 난다.





외국인 지원과 처우에 관한 정보를 다수 입수하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을 파악했다.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석사 출신이고, 학사는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이점에 관하여 질문하자, 인사담당자는 약간 대답을 살짝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3월 4일부로 회사견학을 마치고 토호쿠대학으로 돌아왔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2009년 3월 4일에서 3월 중순까지

일본은 4월에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에, 3월에 학생들의 진학 현황에 관한 자료가 나온다. 그 회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학부 학부생들의 석사코스 진학률이.. 8~90%?”

2000년대 중반 이후, 의학과 바이오와 플랜트의 전분야를 섭렵하는 화학공학은 한국공대에서 가장 인기높은 학과로 떠올랐다. 모교 화학공학 출신으로 취업이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 때문에 대학원 진학률은 전체의 2~3할 가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비율이 정반대였다. 2009-1학기 실험과목을 함께 이수하며 어울린 학부생들에게 물어봐도, 대부분이 대학원 진학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로... 바로 취업하겠다는 학생을 딱 한명 보긴 봤다. 도쿄의 금융업계로 취업하고 싶다는 녀석이었는데, 전공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니 석사진학을 하지 않는게 이해가 갈 만도 하다.

덩달아 들려온 소식. 대학생 기준으로, 4학년이 되어 구직활동을 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보통 졸업하기 1년 반 전부터 구직활동에 들어선다. 따라서 졸업을 1년 앞두고 합격통지를 받기도 했다. 즉, 3월 요즘 시즌. 연구실에서도 3학기차 들어가기 직전의 석사생 두어명 가량이 ‘내정(합격) 결정됐다!’하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것이 잡 페어나, 일반적인 엔트리가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연구원이 면접을 보러 도쿄에 가는 게 아니라, 도쿄에서 인사담당자가 면접을 보러 대학에 왔던 것이다. 이 상황이 한국학생들에게 이해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회사견학을 통하여 화공엔지니어로 일하기 위해서는 석사가 기본이라는 것. 그리고 인맥 없이 혼자 힘으로 벌이는 구직활동이란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2009년 3월 마지막 주

사람이 그동안 줄곧 쫓던 목표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말 그대로 멍~ 해지는데, 그 때 그랬다. 일본취업이라는 목표가 한참 멀어져버린 기분. 이제 어떻게 하나. 하릴없이 시간만 흘러, 3월도 이제 마지막 주. 연구실에서 묵묵히 회사설명서를 읽고 있는데, 박사과정 연구원씨가 놀러왔다.

박사생 : 아사히군, 뭐하고 있어?^^
: 아, 아무것도.....
박사생 : 일본에 취직하려고?
 : 음... 하지만 잘 될 것 같지 않아서요.


마음씨 착하고 상냥한 이 박사생은 가끔 날카로운 직언을 해주실 때가 있었다.

박사생 : 아사히군이 일본에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우선 교수님과 상담해보는게 좋아. 교수님은 40년째 대학에서 재직하시면서 여러 곳에 많은 후배들과 제자들을 두고 계시니까. 봐, 이번에 들어가는 녀석도 회사에서 여기 와서 면접을 보고 갔잖아? 물론 여기 닛케이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는 것도 좋지만, 교수님하고 상담해보면 더 직접적이고 좋은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대학원도...
 : 하지만 대학원은 여기로 오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박사생 : 물론 오라고 하겠지. 나도 아사히군이 우리한테 왔으면 정말 좋겠어. 하지만 아사히군이 아키하바라로 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걸 말리거나 막거나 하진 않으실거야.
 : 거기서 아키하바라가 왜 나오는 겁니껴-_-!?!?
박사생 : 하여간 잘 생각해 봐~^^


웃음을 남기며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고 나가셨다.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 2009년 3월 28일에서 4월 1일까지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을 때는 성우 라이브야말로 최고의 보약이다. (-_-?) ‘花見’를 주제로 한 제4차 도쿄방문을 3월 28일~4월 1일에 실시했다. 3월 29일은 럭키스타의 무도관 라이브. 카토 에미리씨의 예쁘고 잘빠진 다리(..)와 히라노 아야씨의 밝은 미소를 보며 어두운 마음을 날려버린 다음 날 3월 30일, ‘약속의 장소’를 다시 찾았다. 願いが叶う場所, 그곳은 오다이바 해상공원. 일본유학의 결정적 계기가 된 신성한(?) 곳이다.



<레인보우 브릿지 걸어서 건너는 중>


JR 야마노테선 타마치(田町)역에서 내려, ‘걸어서’ 레인보우브릿지를 건넜다. 칼날같던 차가운 바람은 이제 봄기운 가득한 따뜻한 바닷바람으로 바뀌었고, 이곳저곳에 피어오르는 벚꽃이 봄의 만래를 알리고 있었다. 다이바 해상공원의 모랫사장 위. 3년 전 여름, 이곳에서 일본유학의 계시를 받았다.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귓가에 울려펴지는 노래는 Kanon 엔딩, 風のたどり着く場所. 처절할 정도로 독하디 독한 센다이의 겨울을 극복한 내게 보내는 하늘에서의 축하메시지였다.



다시 계시가 있었다. 절대로 2010년 2월에 8학기만에 졸업하지 못할 것이다.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한다. 2010년 2월에 졸업하는 것이야말로 구직활동 첫 번째 요건이다. 4월에 입사를 해야 되는데 2월에 졸업을 못한다는 소리는? 구직활동을 완전히 단념하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오리까? 답은 주어져 있었다. 살아오는 매 순간, 우연을 가장한 기적으로 내게 다가온 모든 것들이, 그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수수께끼는 풀리고, 흩어진 증거와 힌트가 맞물려, 단 하나의 진실을 드러냈다. 도쿄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라.는 답을 말이다.



토호쿠대학에 와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연구가 좋다. 아침에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해서, 연구실 문을 따고 들어서, 조용한 가운데 차 한 잔을 타마시며, 스스로의 프로젝트를 묵묵히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격에 잘 맞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전공 지식으로, 이런저런 분석으로 결과를 내며, 어려운 계산과 설계로 고민하고 애를 쓰고, 가끔 교수와 연구원들과 차를 마시며 갖는 브레인스토밍은 과학기술인만이 갖는 연구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기에 하루 10시간에 달하는 연구실 생활을 즐거이 감당했던 것이다.

연구실 사람들은 나를 정말 좋아해 주었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이곳 센다이에서는 지인이든 친구든 한국의 사람들을 도와줄 방법은 바이없었다. 이제사 싹을 틔우고 발전해가는, 한국개신교와 일본기독교단의 협력사업을 섬길 수 있는 여지도 적었다. 혼자 편하자고 지금까지 해 온 봉사와 섬김의 삶을 축소하거나 그만둘 것인가? 지복근원(至福根原), 그것은 인생 제2의 목표인데.



2000년도에 무엇 때문에 ああっ女神さまっ을 보며 인생의 3대 목표를 세우고, 삼권분립의 원칙을 제정했는데, 그 덕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지금 와서 지난 9년의 세월을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늘의 결론은, ‘혼자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라고 일본에 보내준 것이 아니다.’ 라는 거였다.

마음을 정리한 다음 날 4월 1일... 청춘18로 센다이에 돌아와서, 교수에게 장래에 대한 고민으로 면담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여기까지가, 칸나기 교환유학 전반기 (2008년 10월 ~ 2009년 3월) 까지 제2영역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적은 것.

당시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한 고민과 혼란 속에서 유학생활을 보냈다. 일본에서의 구직활동이 좌절먹고, 대학원 진학은 토호쿠대학이 아닌 도쿄로 지원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아마 친하거나 만났던 지인들 중에는, 수도권 대학원에 지원중이란 사실을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듯.

[그래서 어느 대학?]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_-!? ;;;)

어느 대학에 지원중인지는, 2010년 7~8월에 말씀드리련다. 평범한 삶을 꿈꾸는 자에겐 ‘학벌’이란 그닥 중요한 꺼리가 아니니까. 아무 이름없는 구석진 대학도 괜찮다. 단지 수도권에 있느냐 없느냐, 즐겁게 연구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 고로 어딘지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하여간에 ‘도쿄 혹은 카나가와 등 수도권에 소재한 대학원’으로의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올해년도 전형요강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항례의 예로 추측해 보면...

7월 초중순에 원서 접수,
8월 30일~9월 1일 필기시험 및 구술면접,
9월 중순 합격자 발표, 2011년 4월 도일


토플성적과 더불어, 필기시험은 수학 및 역학. 현재 토플과 더불어 선형, 공업수학, 역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




때문에 지금 사는게 말이 ‘안식년’이지, 하루하루를 골때리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 그때 모교 간다고 했으면, 지금쯤 과거문제나 슬쩍 들춰보며 진짜 팽팽 놀고 있었을 텐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알바하고 영어와 수학 및 역학의 독학에 매달리고 있자니, ‘미쳤지’ 소리도 올해 들어서 몇 번이나 했더라?



그래봤자 이렇게 고생을 하게 될 줄이야 작년부터 이미 알고 있었고.. 또 뻔히 고생할 줄 알면서 선택한 길이니까 후회는 하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숱한 고생 끝에 얻는 보람도 적지 않고요. 예를 들어, 올해 영어공부에 매달리며 독해력이 많이 늘었는데.. 아니면 지금처럼 나니아 연대기를 편하게 읽어내려가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남은 5개월여의 시간.. 비록 독학이건만 차분히 준비하여 일본 수도권 지역의 대학원, 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일본의 대학원에 합격하는 순간,



ALL HAIL 백합!

ALL HAIL 백합!!

ALL HAIL 백합-!!!


「대한백합학회 도쿄지부단」
창설의 꿈이 마침내 눈 앞의 현실로!!







Posted by 水海유세현
,